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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미소 천사는 웃기 힘들다

2025-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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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미소 천사는 웃기 힘들다

입력 2025-05-27 04:30



서울의 한 총괄우체국.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의 한 총괄우체국.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의 한 총괄우체국 창구 직원 민숙(가명)씨. 쉰을 앞둔 그는 매주 수요일 정규 근무 시작 시간보다 20분 일찍 출근해 '고객 만족(CS)' 교육을 받는다. "고객 앞에서 '웃으며' 친절히 응대하라." 언제나 같은 메시지로, 창구 직원들에겐 세뇌 교육에 가깝다.

민숙씨가 받는 'CS 데이' 교육 내용을 살펴봤다. 3월 첫째 주 교육에선 업무 개선 사항으로 민원 응대가 꼽혔다. 이를 잘하려면 '인사와 미소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됐다. 그냥 웃으면 되는 것도 아니다. 고객이 오면 '눈맞춤' 맞이 인사 1.5초를 하고, 업무가 끝나면 눈맞춤 배웅 인사를 1.5초 하라는 주문이 나왔다. 합계 3초의 여유 캠페인은 전국 창구 직원에게 하달된다. 마스크를 썼어도 입꼬리를 올리고 현금 담는 접시를 두 손으로 고객에게 건네면 우수 사례다.

3월 셋째 주 교육에선 미소로 대표되는 '인적 요소'가 부진하다는 지적과 성적 향상 추진이란 목표가 새삼 강조됐다. 지난해 고객만족도(KPCSI) 분석 결과가 제시됐으니, 성적 향상이란 곧 CS 실적 올리기인 셈이다.

우체국에선 실적 향상을 위해 고객만족도 조사 9개 문항 분석 교육까지 이뤄진다. '2025년 우리 모두 미소 천사가 되어 보자'는 문구가 따라붙었다. 우정사업본부 내부망에는 'CS 자랑방'도 있는데, 전국 우체국별 '미소 천사' 사례가 경쟁하듯 올라와 5,000개를 넘었다.

이런 CS 제일주의에서 일하던 민숙씨가 스토커에게 성희롱 편지들을 받고 창구를 벗어나게 해 달라고 호소했다. 고위 간부는 "당신이 항상 밝은 표정으로 응대하니 누구라도 거래하고 싶을 것 같다"고 답했다는 2차 가해 의혹으로 감사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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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이 CS 향상을 위해 미소를 띠라면서 정작 악성 민원에 늘 노출되는 직원들의 피해 신고와 보호·회복 조치엔 소홀했던 게 아닌지 돌아볼 때다. "그러게 왜 뜯어봤냐"는 상급자의 무분별한 얘기가 용인되는 시대는 지났다.

우정사업본부는 지난해 한국산업의 고객만족도 공공서비스 부문 1등을 차지하며 26년 연속 1위 대기록을 세웠다고 자부했다. 다만 그 이면엔 윗선의 CS 실적 달성을 위해 직원들에게 웃음과 친절만 강요한 실상이 있다. 구성원으로서 존중받지 못했다는 우정직 감정 노동자들의 토로도 새어 나온다.

민숙씨 같은 우정직 공무원은 행정직과 달리 헌신해도 직위를 못 받는 인사 철벽 앞에서 체념하며 근무한다. 우정직은 조직 전체 구성원의 70%가 넘는 2만3,000여 명이다. 웃기 힘든 직장에서 "절이 싫으면 중이 나가면 된다"는 소리만 들어왔다는 이들의 얘기를 경청할 때다. 고객에게 진짜 미소를 보여 주려면 조직 문화가 달라져야 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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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성 기자 hshs@hankookilbo.com